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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ARM 석도범









The Stone bridge of no return

又巖 石道範 生涯 (1925 ~ 2020) 實錄

“나는 함경북도 학성군 학동면 탑하동(塔下洞) 236번지 전산리(煎山里)에서 1925년 음2월 16일 아버지 石鐘三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님과 큰형님 忠範과 형수님 여동생 金蘭과 동생 行範 그리고 조카 桂月, 順月, 海月, 明善과 한집에 살았다.

둘째 형님 賢範과 형수님 조카 雄善, 幸善은 분가하여 일가를 이루고 앞집에 살았다.

누님 金順도 출가하여 한마을에 살았다.

아버님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검소 절약으로 부락에서 남들보다 많은 농토와 임야를 가지고 있었다.

내 고향 탑하동(塔下洞)은 큰 국도변을 따라 전산리(煎山里)를 포함, 크고 적은 8개 부락으로 이루어졌다.

石씨 집안은 전산리 세집과 옆부락 도직우(道直隅)에 세집하여 모두 여섯 가구 뿐이다.

우리 石씨 집안은 전산리에 石씨 조상을 모신 선산(先山)을 잘 가꾸어 왔다.

명절 때가 되면 집안 남녀노소 모두 함께 제사를 올리고 조상을 경배하면서 화목하게 살았다.

나는 한때 서당(書堂)에서 한자 공부를 했다.

이웃부락에 한학(漢學)과 글씨 잘 쓰시는 명필(名筆) 馬宗河 선생님이 살고 계셔서 붓글씨 공부도 하였다.

“1934년 집에서 이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학동(鶴東)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송림이 우거지고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가 있고 논밭이 있는 곳에 목조로 세워진 학교이다.

약 2년 동안은 도보로 통학하고 3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다.

이 자전거는 형님께서 직접 일본에 주문해서 상자에 들은 채로 받아서 이를 끄집어내어 조립해 주셨다.

나는 재학 중 6개년간 개근상, 6개년간 학업 성적수석상을 받았으며 6개년간 학급 급장을 지냈다.

“1940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등상 개근상과 함께 함경북도 도지사 표창장을 받았다.”

학교에서 형님께 상급 학교 진학을 적극 권고한다.

형님은 진학시키기로 결심하고 부모님과 모든 가족들을 설득했다.

이리하여 경찰서장으로부터 일본 가는 도항증명서를 발급받고 진학 상 필요한 서류를 갖추었다.

1 6개년간 개근 증명서

2 6개년간 학업성적증명서

3 6개년간 조행(操行) 증명서(품행, 급장)

4 함경북도 도지사 표창장

5 학교장 진학추천서

나는 동경 유학 중에 있는 선배 앞으로 짐을 부치고 출발과 도착하는 시간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

나는 성진(城津)역에서 전송을 받고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탔다.

일본 시모노세키(下関)에서 기차를 타고, 동경역에 도착하니 선배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리하여 내가 주거할 곳 도쿄도우시고미구 후구로 마제리, 가꾸라자가 APT33 (東京都 牛込固 袋丁里 神樂坂APT 33號)호실에 내살림을 풀었다.”

동경 도착 다음날 초등학교 선생님 지도 말씀 따라 동경도청 학무과를 찾았다.

모든 서류를 제시하고 진학 상담을 했다.

내가 하는 이야기와 모든 서류를 일일이 보고 매우 놀라시면서 거듭 칭찬을 주신다.

학무과 직원은 그 자리에서 동경 제3 도립중학교 교장과 직접 전화 통화로 입학을 추천했다.

그리고 추천장을 써주시면서 학교 위치와 찾아가는 요령을 가르쳐 주시고 학교장을 만나라고 하였다.

나는 동경 도지마(豊島)구에 있는 동경 제3 도립중학교를 찾았다.

학교구경도 하고 학교장실을 찾았다.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받으시고 입학에 관계되는 모든 서류를 살펴보시고 몇 가지를 질문하고 난 뒤 크게 환영해 주신다.

그리고 동경 제3도립중학교의 역사와 내력을 말씀해 주신다.

그리고 관계 직원을 불러 입학원서를 작성시키고 모든 서류를 첨부하여 접수를 마쳤다.

관계 직원은 수험표와 유인물 수험상 주의사항을 주면서 지각하지 말고 시험을 잘 치루라고 하였다.

동경 제3 도립중학교에는 한국 학생이 전교 5명뿐이고 일본의 지방 학생은 거의 없고 동경 내에서 선발된 가장 우수한 학생들만 모인 학교라고 말했다.

“겁 없이 덤비던 나는 비로소 놀라움과 두려움에 가슴이 뛴다.”

입학시험날이다.

배치된 수험장에 입실하여 필기시험을 마쳤다.

다음날은 신체검사와 구두시험을 받게 되는데 타학생들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고향에 관한 것, 부모 형제에 관한 것, 재학했던 학교에 관한 것, 장래 희망 등에 관해 깊이 따져 물었다.

이리하여 입학시험 모두를 마쳤다.

이제는 합격자 발표를 보는 일만 남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며칠을 지내고 합격자 발표일을 맞았다.

나는 합격자 발표 게시판을 찾았다.

나는 곧 수험번호 이름을 찾아냈다.

“이제는 동경 제 3도립중학교 학생이 된 것이다.”

나는 즉시 고향 부모님과 형님 앞으로 합격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모교 은사님께 합격 소식과 함께 은혜에 감사드리는 편지를 보냈다.

동경도 학무과 직원을 찾아 베풀어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입학 수속서류에 보증인이 되어 주셨다.

나는 교납금과 함께 입학 수속을 마치고 교복과 교모, 책가방, 교과서를 구입했다.

이리하여 입학식과 함께 학업이 시작됐다.

식생활은 APT 공동 취사장과 방 안에 있는 취사 시설을 쓰면서 자취생활을 했다.

그러나 쌀이 너무 귀했다.

배급받는 이외는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

한 학기를 지내고 나를 돌이켜보니 일본 수재들 속에 끼어서 학업성적이 밀려나는 것을 느꼈다.

집에서 보내오는 학비를 갖고 간사히 지내는 형편인데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받을 형편이 못 된다. 그러나 식생활과 교통비, 기타비용을 아껴서라도 보충수업을 받을 결심을 한다.

동경 간다(神田)에는 학원들이 집결해 있다.

硏數學館, 正則學院, 昊數學院 등에서 여러 교과목을 번갈아 가면서 보충수업을 받았다.

방학이 돼도 고향집에 갈 생각을 못한다.

왕복 차비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어찌하다가 고향을 찾는 수가 있다.

시모노세키(下関)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항에 내린다. 시모노세키는 잘 살고 부산은 가난해 보인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간다. 일본 기차 안에서 본 손님과는 너무 초라해 보인다.

서울풍경은 동경과는 전혀 다른 한 시골 모습이다.

서울에서 성진(城津)가는 기차를 탄다.

역시 가난하고 모두 고생스러워 보인다.

학생들은 모두 국방색 옷에 국방색 모자와 책가방을 메고 다닌다.

“나는 검정색 양복에 검정색 모자에 검정색 망토를 두르고 검정색 구두를 신고 있는 것이다.

통치하는 일본인은 잘살고 통치를 받는 한국인은 가난하고 못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향 집에 왔다.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지낸 부모 형제 온 가족과 이웃이 모두 함께 반가워한다.

그러나 모두 가난에 찌들고 고생하는 모습이다.

동경 도시 생활 풍경과 한국의 도시 그리고 농촌 상은 매우 뒤떨어지고 크게 비교가 된다.

내가 동경에 유학하면서 지내는 생활은 동경에서는 제일 가난하지만 고향 부모님과 형님 가족들에게는 마음속으로 송구스럽기만 하다.

나로 말미암아 부모님 형님 가족들이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아버님의 몸체와 다름없는 기름진 논밭을 잘라 팔아가면서 나를 뒷바라지하고 있으니 내가 장차 무슨 일을 해서 이런 큰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앞날이 어두워 보인다.

“어려움을 겪는 집안 실상을 직시하면서도 또 학비를 마련하여 동경행 기차를 탄다.”

“이렇게 하여 동경 유학 생활도 몇 해가 지나갔다.”

태평양 전쟁은 나날이 해를 더하여 크게 번지고 격전을 더 해갈 뿐이다.

모든 시책과 일들이 전쟁체제로 총동원되고 전쟁력으로 총결집돼가고 있다.

동경시가를 행보하는 청년 수도 격감해가고 많은 병들은 청년들과 불구가 된 상이군인들이 많이 보인다. 한국 학생과 청년들도 지원병과 징병 등으로 군에 출정한다.

전쟁 준비와 전쟁물자를 생산하고 전쟁 요원으로 징용소집에 총동원이 된다.

학교 학생들도 전선을 향해 특공대로 출정하니 자리가 여기저기 비어간다.

때때로 동경공습에 대비하는 방공훈련이 실시된다.

모든 정세가 날로 긴박해져 간다.

동경 전면 폭격에 대비하는 동경 도시 소개령이 발표됐다.

이 소개령에 의해 각급 학교에 소개령이 내려졌다.

제1단계로 각급 학교 학생들을 미리 지방학교에 소개(疎開)하는 전학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나에게도 담임선생이 고향 학교로 전학하는 일을 상담한다.

며칠을 지내고 고향 부모님 형님과 상의도 없이

“나의 독단으로 동경 도시 소개령에 의한 귀향 전학을 희망했다.”

학교 당국에서는 즉시 동경도청 학무과에 전학 수속을 취해주었다.

학교는 정상으로 등교하고 수업을 받았다.

겨울방학이다.

나는 고향 집에 짐을 부쳤다.

격변하는 시국과 함께 차표 사려는 사람들이 동경역에서 밤샘을 하면서 지낸다.

배를 타야 할 시모노세키(下関) 사정을 알아보니 배를 타기까지는 며칠씩 기다려야 차례가 된다고 했다.

나는 귀향 코스를 바꾸었다.

기차를 타고 니이가다(新潟)에 갔다.

니이가다에서 청진가는 배를 탔다.

관부연락선보다 배는 적고 배 타는 시간도 길고 파도는 몇 배 더 높고 배의 요동이 너무하다.

배 칸에서 공처럼 뒹굴어 다니면서 토할 것이 없을 때까지 토해내고 몸을 가누기 어렵다.

그래도 식사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이십여 시간 향해 끝에 청진항에 도착했으나 무슨 이유인지 하선을 안 시킨다.

나진(羅津)항에 가서 배를 내렸다.

너무 춥다.

부는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드는 모래와 작은 모래들이 뺨을 치고 눈도 뜰 수 없고 귀는 떨어져 나갈 추위다.

몸도 녹일 겸 식당을 찾았다.

생선탕을 주문했다.

먹어 보지 못했던 너무 매운 음식이다.

시간을 들여서 땀을 흘리면서 먹었다.

이것이 고향 맛인가 싶었다.

기차를 타고 고향을 향했다.

아무 연락없이 갑작스레 부모님과 형님 가족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놀라움에 어쩔 줄을 모른다.

동경 소개령에 의해 전학 명령을 받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드리니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기쁘게 맞이했다.

1944년 4월 초 함경북도 도청 학무과와 경성(鏡城) 중학교장으로부터 등기우편을 받게 됐다.

동경 도시 소개령에 의한 전학 통지서였다.

즉시 경성 중학교에 전학 수속을 필하고 출석하라는 공한이었다.

나는 형님과 함께 모든 준비를 갖추고 다음날 경성중학교를 찾아 교무주임을 만나 전입학 수속을 마쳤다.

그리고 학교장에게 인사를 드렸다.

내일부터 등교해서 수업을 받으라고 지시한다.

지정서점에서 교과서를 구입하고 지정 교복점에서 교복과 교모, 책가방 등을 샀다.

그리고 교복점에서 하숙집을 소개받았다.

“이리하여 경성중학교 생활이 시작됐다.”

선생님들이 모두 성난 사람처럼 얼굴에 웃음이 없다.

그리고 엄해만 보인다.

수업은 충실하다.

교풍은 지나치게 엄하고 기율이 세다.

특히 장검을 차고 군복차림을 한 군사교관의 모습과 말씨와 거동이 교풍을 압도한다.

강한 일본 정신훈화에 크게 자극을 받는다.

표정 관리나 거동 한가지라도 실수하는 날엔 공포감마저 든다.

매주 월요일에는 애국 조회가 있다.

입학 몇 주간을 지난 월요일 강당에서 전교 조회가 있었다.

너무 강한 기율과 훈화에 무서움마저 느낀다.

일본 애국가를 부르는 일은 익숙하나 황국신민서사는 동경에서 전혀 해본 적이 없다.

조회가 끝나고 차례대로 입실을 한다.

그런데 유도선생이 나를 잡아 놓고 강당에 남으라고 했다.

전교생 입실이 끝나고 유도선생은 나에게 너는 애국가를 왜 그렇게 부르느냐, 황국신민서사를 그렇게 제창하느냐고 말한다.

내 자신은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유도선생은 대노하면서 나를 고쳐준다고 맛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나를 공처럼 이리저리 던지면서 혼을 뺀다.

“‘네놈은 동경에서 신사교육만 받은 놈이다. 정신을 차려’ 하고 또 던진다.”

“코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흐르고 정신이 없다.”

그리고도 모자라서 또 반성문을 씨운다.

이것이 경성중학교에 입학해서 받은 큰 선물인 셈이다.

이것은 동경 교육환경과는 너무 다른 점이다.

나는 너무 놀라움과 함께 어물쩍 하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하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고 학교생활에 임했다.

학교 교육이 전시동원체제로 급변했다.

정규교육 과정을 변칙적으로 바꾸어서 학년별 학급별로 조를 편성하여 산업 현장에 동원 노무 봉사를 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부령(富寧) 제철공장에 동원되고 격월제로 노무봉사 하는 일을 하게 됐다.

노무자를 안 쓰고 우리 학생을 동원하여 철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할당제로 일을 매기고 강제로 책임 완수케 하는 것이다.

한방에 십 명 범위로 배정 합숙게 하고 배고픈 식사를 해가면서 험하고 힘겨운 생산량을 감당해야 했다.

이 또한 동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경성중학교 한 해가 정신없이 전쟁하듯이 지나갔다.

이리하여 1945년 3월 경성 중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시기에 맞추어 징병 문제가 대두되었다.

나는 즉시 일본 동경에 갔다.

징병을 연기받는 것이 급선무가 됐다.

“나는 동경시부야구에 있는 청산학원 고등사범에 진학했다.”

당시 사법계 대학생은 징집이 보류됐었다.

그러나 학업은 거의 정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경도가 전쟁터로 격변되고 공습경보와 방공훈련 공습을 겪는 실정에 있었다.

모든 관공서와 회사, 사업체들이 전쟁력에 총동원되고 있었다.

학교는 학생들이 지원병과 특공대로 전방 싸움터로 향하게 됐다.

강의실은 텅 비어가고 강의도 중단과 결강 등으로 전쟁하는 학교가 됐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몇 달을 지내던 중 일본은 전쟁을 더 버틸 수 없게 되어 항복을 했다.

“이리하여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본통치에서 풀려나 해방을 맞게 되었다.”

36년간 일본 식민지 통치는 우리 한국인을 일본인이 부리는 노무자를 만들어 냈다.

전 국토는 일본인과 일본의 번영을 위해 긴요한 몫을 담당했다.

보상받을 길 없는 피맺힌 역사가 너무 한스럽다.

돌이켜 생각하니 우리 민족의 어리석음에 책임을 통감한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해방이라 하면 나라를 우리 민족에게 돌려주고 우리가 주인이 돼야 마땅하다.

38선을 그어 남북으로 양분하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해방이며 독립인가?

일본을 내어쫓고 소련과 미국이 나누어 가지는 술책인가?

어찌 이런 비극이 있단 말인가?

정의가 있고 사랑이 있고 인도(人道)가 있고 천도(天道)가 있는데 이런 모순을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한민족의 처지가 너무 가엽기만 하다.

나는 1946년 3월 서울에 왔다.

성동구 신당동에 있는 명진사(明進舍) 보육원에 숙소를 정하고 보육원 일을 도왔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중등교원 국문과에 입학했다.”

미군정청문교부장 유억겸 선생이 소장이시고 국문과 교수님으로 문교부 편수과장 최현배 선생, 초등교육과장 이호성 선생 그리고 이병기 선생, 김윤경 선생, 정인승 선생, 한갑수 선생 등 저명 교수님을 모셨다.

일본 통치하 무지몽매하게 살아온 까막눈을 뜨게 해주었다.

우리는 일본 통치 하 우민정책에 속아 나도 모르고 겨레도 나라도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일본은 우리 말과 글, 노래까지도 없애 버렸다.

우리 문화와 역사, 우리 민족의식과 사상, 철학 예술을 멸살해버렸다.

우리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린 채 문맹으로 일본인이 부리는 머슴이 됐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통치 36년간의 실상과 죄악상을 깨우침으로써 참된 우리 역사를 깨쳐주었다.

“이리하여 1946년 8월 졸업을 하게 됐다.”

“우리나라 처음으로 문교부 발행 중등학교 국문과 교원 면허장을 받았다.”

나는 명진사 보육원 일을 계속하면서 성도 중학교 국문과 강사로 출강하게 됐다.

한편 나는 서울사범대학 중등교원 양성소 사회생활과에 편입하였다.

이때 서울대학교 종합대학 안이 선포되고 종합대학이 출범하는 때이다.

이 종합대학안에 반대하는 좌익 학생들의 데모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날로 격화되면서 학업 분위기를 시끄럽게 하였다. 당시 장이욱 사범대학장이 직접 교정 연단에서 종합대학 안과 종합대학의 실제에 대해 연설을 하면서 데모 시위를 막는데 큰 애를 쓰셨다.

이런 교육환경에서도 우리는 수업 시간을 빠짐없이 지켰다.

교수님들도 결강이 없었다.

이리하여 1947년 4월 서울 사범대학 중등교원 사회생활과를 졸업하고 문교부장이 발행하는 중등학교 사회생활과 교원면허장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재학 중 1947년 2월 뜻하지 않은 목병에 걸린다.”

몇 달을 지내면서 조금씩 커진다.

나는 서울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결핵성 임파선 염이라고 병명을 부친다.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별로 효험이 없다.

나는 서대문 적십자 병원을 찾았다.

태양등을 환부에 쪼이면서 매일같이 치료를 받는다.

그래도 효험이 없다.

또 백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백병원에서도 효험을 못 봤다.

태평로에 대만사람이 경영하는 간야(簡野)병원을 찾았다.

정성껏 치료를 베풀어 주신다.

환부가 크지는 않으나 조금 붉어진다.

의사는 환부를 간단하게 수술을 한다.

이것이 동기가 돼서 수술 환부는 낫지 않고 목 다른 데 가서 똑같은 임파 알맹이가 생긴다.

나는 늘 환부에 붕대를 감고 있다.

여러 약방에서 약신 세도 많이 진다.

발병 이후 모든 병원비는 서울대학교 학생증명서를 제출하면 면제받을 수 있었다.

명진사 보육원에서 봉래동 하숙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성도 중학교 국문과 강사는 계속하였다.

목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형편이라 정규 교사직을 가질 수도 없다.

좌절감과 함께 목병은 나를 막연하게 오래 괴롭힐 뿐이다.

겨울을 지내면서 환부는 더 나빠졌다.

이리하여 고향에 가서 목병을 치료하고 다시 돌아올 결심을 굳힌다.

그러나 38선을 넘는 일이 걱정이다.

명진사 보육원 원생 중에 중학교에 다니는 황해도 출신 학생이 있었다.

이 학생이 여러 차례 38선을 넘어 다니면서 장사를 한 적이 있어 38선을 넘는 일은 자기가 길을 안내하겠다고 자청했다.

“1948년 3월 말 이 학생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38선을 넘었다.”

그리고 이 학생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나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기차표를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리원 보안서를 찾았다.

모든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목에 붕대를 풀어 헤치고 상처 부위를 두루 살피고 증명서를 발급, 기차표를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이리하여 성진에 도착했다.

지난 며칠 동안 목의 여러 임파 알맹이들이 마주 터져버렸다.

나는 시골집에 가기 전에 성진(城津) 도립병원 김성우 박사를 찾았다.

우선 환부를 알코올 등으로 닦아내고 붕대를 감아주고 입원 수속을 해주시면서 시골집에 연락을 취했다.

형님께서 놀라시고 뛰어왔다.

모든 이야기를 간단히 나누고 즉시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을 마친 김성우 박사는 좋은 약을 마음대로 구할 수 없다고 걱정을 한다.

결핵성 임파선염은 난치병이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약 1개월 동안 병상에서 치료를 했어도 도무지 치유가 되지 않는다.

이제는 퇴원해서 집에서 치료하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이리하여 병원을 나와 집에 갔다.

“이것저것 마음이 매우 괴롭다.”

“이제는 병든 몸이 돼서 부모님 형님 온가족들 앞에 나타나 더 큰 고생과 불행을 안겨주게 됐다.”

집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시골병원이 옛날부터 있었다.

이 병원에 매일 치료 차 가서 약물로 환부를 닦고 가제를 갈아 끼고 붕대를 감고는 집으로 오는 것이다.

병원에 다른 약은 없기 때문이다.

시골인지라 이 사람 저 사람이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민간요법 비방들을 이야기한다.

집에서는 모두 이와 같은 비방치료에 마음이 쏠린다.

먹으라는 약을 먹고 환부에 바르라는 약을 바르면서 낫기를 바라지만 효험이 없다.

“비방으로 주사약을 만들어 이 주사를 놓아 많은 환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분을 멀리 찾아가서 모시고 왔다.

이분은 고칠 수 있다고 장담을 한다.

한 달에 한 번씩 목 혈관에 이 주사를 놓는다.

이 주사를 한번 맞으면 하루는 고통을 겪으면서 지낸다.

이 주사를 한번 맞는 비용이 무조건 쌀 한 가마이다.

당시 쌀 한 가마는 큰 비용이다.

그리고 극진히 식사 대접을 하고 방을 비워 특별히 주무시게 하고 정성을 다해 모신다.

두 번 세 번 주사를 맞았는데도 효험이 없다.

미련을 못 버리고 다섯 번까지 주사를 맞았으되 효험은 없다.

이리하여 또 몇 달이 지나가고 쌀 다섯 가마까지도 없애 치웠다.

“얼마 동안 지나서 환부임파를 하나씩 태워서 뿌리를 뽑아 근치한다는 한의사가 나타났다.”

또 한의사에게 치료를 부탁한다.

사카린이라는 약을 스텐레스 칼끝에 조금 담아서 환부임파에 놓으면 살에 닿는 즉시 마구 검게 타들어 간다.

24시간을 타들어 가면 임파 알맹이 하나씩 뽑아낸다.

알맹이 자리는 동그랗게 패인 구멍이다.

며칠이 지나면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와 원상으로 회복된다.

이 임파 알맹이 한 개를 태워서 뽑아내는 24시간은 진통 때문에 송장처럼 엎드려 있을 뿐이다.

마취 없이 생살을 태우는 24시간이 아닌가?

다음 임파를 태우는 데는 태운 임파 자리에 새살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십여 일씩 걸린다.

이리하여 상처가 있는 임파 다섯 개를 차례로 뽑아내니 두 달 이상 걸렸다.

죽기를 마음먹고 버틴 것이다.

그런데 낳았던 임파가 또 하나씩 터진다.

오직 삶을 끝내고 싶을 뿐이다.

지칠 대로 지쳤다.

고통의 세월은 흘러 1949년 8월이다.

“뱀에게 물리면 뱀독으로 목병이 치료된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죽고 살고 하는 일을 하루라고 빨리 판가름내고 싶을 뿐이다.

의사는 위험부담을 말했으나 나는 뱀 치료를 택했다.

항아리에 뱀을 담아왔다.

나는 항아리 안에 손을 넣어 뱀을 만졌다.

뱀은 손등이나 손가락을 문다는데 물지를 않는다.

물리는 방법을 바꾸었다.

집에서 50미터 떨어진 내가 흐르고 모래밭이 있는 곳에 명석을 폈다.

항아리 뱀을 이 멍석에 풀어놓고 다른 곳에 이동하지 못하게 Y자형 나무 막대기로 뱀 목을 짚어 고정시킨다.

그리고 손으로 뱀을 툭툭 치면서 들이민다.

그러나 이 뱀은 물지를 않는다.

의사는 큰 돗바늘을 가져오게 하고 손가락을 뱀 입에 밀어 넣은 채 돗바늘로 뱀 꼬리를 마구 쑤시더니 뱀은 화가 나서 입에 들어가 있는 손가락을 꽉 물었다. 그 순간 놀람과 함께 뱀 입에서 손가락을 확 꺼냈다. 그리고 뱀은 불살러 버렸다. 그런데 저녁때부터 뱀에게 물린 손가락이 심한 통증이 생기고 전신에 높은 열이 발생한다.

의사가 와서 뱀에게 물린 손가락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손가락에 뱀 이빨이 두 개 박혀 있다면서 이 뱀 이빨을 끄집어 빼낸다.

뱀 이빨 자리에서 빨간 피가 흘러나온다.

계속 고열이 생기면서 귀, 코, 입, 얼굴과 전신에 풍선 같은 물집이 삽시간에 전신을 덮었다.

체온 42도에 의식은 희미해지고 동네 사람들까지 모여왔다.

의사는 뱀독이 전신에 퍼져버렸으니 빨리 페니실린 약을 구해서 주사해 보는 길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당시 페니실린 약을 구하는 일은 돈에 관계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형님은 밤중에 오십 리 떨어진 성진도립병원을 향해 떠났다.

의사는 우선 돼지를 잡게 하고 돼지 날기름과 날고기를 가지고 물집으로 쌓인 전신을 덮어서 감았다.

그리고 알몸 채 레인 코트를 두르게 하고 그저 헝겊으로 덮어놓았다.

이렇게 사경을 헤매는 절박한 시간에 형님은 페니실린약을 구해가지고 당도했다.

의사는 즉시 이 페니실린 주사를 놓는다.

그리고 천명을 기다려 보자고 말했다.

온 가족과 동네 분들은 절망에 빠져 있고 의사는 안절부절 어찌할 바 모른다.

몇 시간이 경과하고 아침 무렵 체열이 조금 떨어지는 조짐이 있다.

의사는 희망이 생겼다고 말한다.

온 가족이 하루 동안 번갈아 가면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저녁때 열이 많이 내렸다.

의사는 페니실린 주사를 또 놓는다.

밤새 호전을 바라는 조치였다.

또 한밤을 무사히 지내고 아침이다.

체온이 정상이다.

그리고 말도 하게 됐다.

전신 물집도 조금씩 깔아 앉아가는 조짐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며칠 새 전신 물집도 신기하게 가라앉아 원상회복됐다.

상처는 부분적으로 나아졌다 가도 또다시 터지면서 끝이 안 보인다.

또 다시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니 효험은 있되 완치는 안 된다.

언제 이 목에 감은 붕대를 풀 수 있을까?

고통의 세월은 끝이 없다.

“나는 태어나 부모님과 형님 가족들에게 애물단지 노릇을 한다.”

동경 유학을 한다고 아버님 피와 땀, 몸체 같은 논밭을 팔게 만들었다.

가족들이 받은 경제적 타격도 매우 컸다.

그런데 또다시 고질적 난치병을 얻어 가지고 와서 부모님과 형님 온 가족을 고통으로 몰아 놓고 집안을 거덜 냈다.

내 무슨 일을 해서 이를 보상할 수 있으리! 참으로 고통스럽다.

“1950년 6.25 전쟁이 벌어진다.”

인민군은 처음부터 남으로 막힘없이 남진한다. 북은 남침 준비를 충분히 갖춘 후였으나 남쪽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낸 것 같다.

계속 인민군이 남진하더니 유엔군 참전으로 전세가 인민군 후퇴로 바뀌었다.

인민군 후퇴가 가속화되더니 드디어 국군이 북진해서 우리 고향을 지나 북으로 북진한다.

새 세상을 만난 것이다. 청년, 장년 남자들은 모두 인민군에 끌려가 전쟁에 투입됐으며 나머지 모든 남자들은 산중에 피신 자취를 감추었다.

여자들과 아이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집이 큰 국도변이라서 국군이 북진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다.

나는 국군의 북진을 환영했다.

얼마 안 돼서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했다.

중공군이 개미처럼 강을 넘어 내려온다.

국군과 맞서 육탄전을 벌이면서 남진한다.

국군은 다시 후퇴한다.

“나는 군복을 갈아입고 조카와 함께 국군 제3사단에 입대했다.”

3사단이 후퇴함에 따라 성진 역에서 기차를 타고 흥남 부두에 이르게 되고 군함을 타게 된다.

이리하여 강원도 묵호항에 하선하게 됐다.

대한민국 땅에 온 것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도보 행군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나와 조카는 김해 제2국민병 훈련소에 입소한다.

김해 벌판 논바닥에 볏짚을 겹겹 쌓아서 만든 군 막사에서 몇 달 동안 훈련을 쌓으면서 지냈다.

춥고 굶주리면서 강한 훈련을 받았다.

함께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매일 같이 많이 죽어 나간다.

내 목병은 일부 안정됐으나 아직도 부분적으로 상처를 앓고 있다.

붕대는 아직 감고 있는 실정이다.

1951년 3월 나이 많은 병사들에게 군 복무를 면제하고 제대조치와 함께 귀향 증명서를 발급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 나는 부산으로 향해갔다.“

이때 정부가 부산에 피난해 있었다.

때마침 보건사회부에서 사회사업가를 양성하는 강습회를 추진하고 있었다.

부산시 대청동 소재 새들원(원장 안음전)에서 1개월 과정으로 강습회가 있었다.

나는 이 강습회에 동참했다.

이 강습을 이수한 사람들은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부산을 포함한 전국 각지 사회사업 단체에 취직할 수 있게 돼 있다.

“나는 이 강습을 마치고 부산시 아미동 2가 89번지 소재 자광보육원(慈光保育園) 총무 자리에 취직했다.”

자광보육원은 일본통치 하 있어 온 불교 총천사(總天寺) 절 건물에 있었다.

장덕재(張德在) 원장은 일제 때 이총천사스님으로서 해방 후 자광보육원을 설립했었다.

자광보육원 터는 크고 넓어서 부산사범학교에 일부를 빌려주었다.

부산사범학교는 이 자리에 천막 교사를 짓고 이 자리에서 학교를 운영했다.

부산사범학교 교장실과 교무실은 자광보육원 건물을 쓰고 있어 두터운 친분을 갖고 지냈다.

나는 보육원 총무로서 부산시청 사회관에 출입하면서 식량과 구호물자를 배급받아오곤 했다.

한편 미군 부대를 찾아 자매결연 등을 맺으면서 구호물자를 지원받았다.

고질적인 목병은 아직도 치료를 해야 한다.

보육원에서 약 150미터 지점에 부산시립병원이 있었다.

다행하게도 이 시립병원 신동훈 원장은 나를 경성고보 선배였다.

마음 놓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극진하게 치료를 해 주시더니 드디어 붕대를 풀고 살 수 있게 됐다.

자광보육원은 아미동 산 넘어 궤정동에 밭과 임야가 있었다.

이 터에 자광보육원 분원을 세우는 일을 시작했다.

부산 시청 사회과를 통해 미군사처로부터 건축 자제를 원조받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부산시 괴정동에 자광보육원분원을 세웠다.

한편 부산에 피난 와있는 서울 낙양중공업고등학교 교사 친구로부터 같이 교편을 잡을 것을 종용받는다.

“며칠 심사숙고한 끝에 평생직업으로 교편을 잡을 것을 결심한다.”

그래서 부산시 대청동 소재 낙양중공업고등학교 책임자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력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모든 선생님들께 이사를 나누었다.

이튿날부터 고등학교 국어과 교사로 출근하여 수업을 담당했다.

나는 보육원에서 숙식을 하고 보육원 일도 겸하면서 학교에 출근하는 것이다.

당시 중 고교 학생 총수는 1,500여 명이며 학교 규모가 컸다.

그리고 주 야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얼마 뒤 교무부장 등 보직을 맡아 가면서 밤새워 공부해가면서 열심히 가르쳤다.

“나는 1953년 12월 24일 결혼을 했다.”

백화당(百花堂) 예식장에서 김영필 장로 주례로 많은 교직원과 학생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예식을 치렀다.

그리고 아미동 2가 89번지 자광보육원에서 대청동 4가 7번지 학교 인근에 오막살이를 장만하고 이사를 했다.

이때쯤 서울서 피난 중인 많은 사람들과 학생들이 서울에 많이 복귀하기 시작한다.

낙양중공업고등학교 학생들도 서울에 복귀하기 시작한다.

서울 흑석동 소재 본교에는 많은 학생들을 복교시킬 형편이 못된다.

부산 분교 책임을 맡았던 김형천 교장은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동도중,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리하여 부산에서 서울에 복귀하는 학생들과 함께 교사들을 수복시켰다.

나는 교무부장으로서 부산 분교를 맡아 수업을 관리하고 학교를 관리하게 되었다.

경상남도 당국에서 서울학교는 부산에서 철수, 서울에 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때를 맞추어 학교법인 남성학원 김길창 이사장이 경상남도 당국과 사전협의를 거치고 광성중공업고등학교와 합병하자고 제안했었다.

교사들과 학생들은 합병을 반대했다.

그러던 중 학교 법인 동주학원에서 우리 학교를 인수하여 학교를 새로 짓겠다고 했다.

당시 동주학원 이사로서 경상남도지사 이상용 씨가 있었다.

그리고 경상남도 자유당도 당 위원장이며 중앙당 재정부장, 국회의원 대동공업사장 이용범을 이사장으로 추대해 있었다.

막강한 힘을 지닌 동주학원에 학교는 인계되었다.

동주학원은 즉시 문교부 인가를 받아 동주고등학교 이름으로 학교를 새로 출범시켰다.

“나는 교감 겸 학교장 서리로 취임했다. 때는 1954년 7월이다.”

학교법인 동주학원은 부산시 거제리 철도 부지에 미국원조 자재를 얻어 학교를 지었다.

그리고 대청동으로부터 학교를 옮겼다.

그러나 야간부는 원거리 교통 때문에 대청동 교사에서 수업을 운영했었다.

부산 피난 중에 있던 학생들이 많이 서울에 복귀해간다.

부산 중앙지에서 멀리 떨어진 거제리에 세워진 동주고등학교 학생들도 많이 감소해간다.

학교법인 동주학원은 부산시 서대신동 소재 휴교 중에 있는 군경원호고등기술학교와 교사(校捨) 계약을 체결하고 거제리 학교를 이곳에 다시 옮겼다.

교통상 불편을 덜고 장차 부산중앙지에 학교를 세울 포부를 가지고 취해진 조치였다.

서대신동에는 자매학교인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 학교가 옮겨진 후 학생 수도 나날이 늘고 교사 수도 많이 충원하여 학교 운영이 매우 활기가 넘쳤다.

대청동 야간부도 이 자리에서 수업을 하게 되니 주야간 공히 교세(校勢)를 떨치게 됐다.

“1957년 2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발생한다.”

보건사회부 국장, 과장, 직원 등이 내려와서 부산에서 숙식을 하면서 우리 동주고등학교가 쓰는 건물은 보건사회부 것이니 학교를 비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제대군인과 상이용사 등을 동원하여 학생들과 싸움을 벌리어 학교를 쫓아낸다고 했다.

교사를 어떻게 계약했는지 상황에 화급을 다투게 됐다.

학생법인 동주학원 부이사장이며 국회의원인 김형돈과 재단 참사 최원식과 교장서리인 나와 재단사부장 공광옥이 함께 비행기 편으로 서울에 왔다.

이리하여 서대문에 있는 이용범 이사장 자택을 찾았다.

나는 이용범과 인사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다.

부이사장 김형돈이 학교 문제를 열심히 설명한다.

재단 참사가 설명을 보충한다.

사무장이 실무 면에서 이야기를 보탠다.

알고 보니 서대신동 군경원호고등기술학교 교사 계약과 학교 이전 사실을 이용범은 모르고 있었다.

이용범은 자유당과 정치이야기만 계속 말하면서 별로 학교 이야기에 흥미가 없다.

별로 대구가 없다.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학교 이야기를 벌린다.

군경원호고등기술학교는 어차피 서울에 와야 하고 동주고등학교는 그 자리에서 지금 잘 되어가고 있으니 이사장께서 보건사회부 장관과 한자리 만나서 의논하면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김형돈 부이사장이 역설한다.

이용범은 계속 답을 하지 않고 듣기만 한다.

많은 시간이 지나 비로소 말하기를 학교를 남의 집에 잘못 옮겼으니 제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면서 자리를 뜬다.

나는 안될 말이라고 했다.

이사장 모르게 학교를 옮긴 책임은 여러분께 있지만 지금 어찌 학교를 다시 거제리에 옮길 수 있겠는가?

다시 술자리가 준비됐다.

이용범이 다시 동석을 한다.

자유당 부산 이야기며 정치 이야기며 대동공업사 이야기며 두루 섞어가면서 술잔을 한참 주고받고 하면서 속말들을 많이 털어놓는다.

역시 오래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부산학교가 말썽부리게 돼서 대단히 죄송하다고 인사말을 건네고 이용범 이사장을 동주학원이 영입한 경위, 부산낙양중공업고등학교를 동주학원이 인수한 경위, 학교를 서대신동에 이전한 경위, 이용범 이사장의 사회적 명성 등을 역설하고 우리 학생들과 전 교사들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말했다.

한참 뒤에 이용범은 말하기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감내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고 말했다.

나는 답하기를 학교를 거제리에 다시 이전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사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술자리도 파하고 학교 이야기도 마감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우리 일행은 호텔에 돌아왔다.

모두 사의를 만류한다.

재단 참사가 벼루에 묵을 갈고 나를 부산여자사업고등학교장으로 발령하고 사령장을 써서 나에게 준다.

사전 합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이형리 교감을 동주고등학교 교장으로 발령하고 사령장을 쓰고 서류 봉투에 넣는다.

이렇게 해서 이 일을 마무리 짓자고 했다.

모두 좋다고 하면서 술자리를 벌인다.

그러나 나는 안될 말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 나이도 젊은데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어떻게 대할 수 있겠는가?”

“부산 바닥에 많은 졸업생들까지 외면하면서 어찌 숨어서 죄인처럼 살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동주고등학교를 떠나게 되어 부산에서 살은 약 6년을 마감하고 1957년 3월 서울에 주거를 옮기고 학교 법인 문성학원 문성 여자중상업고등학교 교감에 취임한다.

문성여자중상업고등학교는 일본 통치 하 미국 선교부인회에서 선교목적으로 서대문구 아현동에 설립한 학교이다.

6.25 때 학교 교사를 폭격당하고 학교를 복구 못한 채 마포구에 가교사를 마련하고 학교 운영을 하고 있었다.

김문규 교장은 일제 때부터 이 학교장직을 맡아 오신 분이다.

학교법인 문성학원은 재력이 없었다.

학교 재건에 동분서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자유당 젊은 인사들과 인맥을 갖게 되어 학교 법인 임원으로 영입함과 동시에 서울 종로구 충신동 소재 자유당 청년문제연구회 건물에 학교를 옮겼다.

학교 재건의 꿈이 활발히 진행되던 중 자유당 정부가 막을 내리고 자유당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때 자유당 출신학교 법인 임원들이 모두 학교 일에 손을 떼고 말았다.

4.19를 시점으로 많은 사립학교에 폭풍이 불어 닥친다.

무력한 학교 재단을 배격하고 데모 등 실력행사가 도처에서 벌어진다.

이때 문성학원을 인수하여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유력인사가 등장한다.

특히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적극 천거하고 영입에 앞장선다.

이것이 진정 학교 재건의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교장 김문규 선생과 교감인 나와 서무부장 등이 함께 자리를 비워주고 학교를 새 경영진에 넘겼다.

이리하여 문성학원 재직 5년의 역사를 마감했다.

나는 문성학원에 재직하면서 김문규 교장 선생 친구분들과 교분이 많았다.

그중에 한 분이신 대신중고등학교 설립자이시며 학교장인 일은(一隱) 金熙 선생과도 교분이 깊었다.

그리고 김문규 교장은 학교법인 대신학원 이사이시다.

김문규 교장은 대신학원에서 일해보라고 몇 차례 이야기한 적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金熙 선생께서 사모님을 제가 살고 있는 마포 공덕동 집에 보내셨다.

김희교장이 대신학원에서 같이 지내자고 하니 학교에 나오시라고 하신다.

이리하여 김문규 교장과 金熙 선생이 자리를 같이하고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학교 이야기를 한다.

세 사람은 영천 대포집에 자리를 옮기고 지낸 날처럼 화기애애하게 정담을 나눈다.

나는 1957년 문성 여자중상업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부터 김문규 교장 따라 여러 해 동안 마포 공덕동과 아현동 그리고 서대문 영천 등에서 김희교장과 자주 만나서 대포 술잔을 나누면서 매우 정답게 지냈었다.

“이리하여 대신학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때는 1961년 10월이다.”

화살같이 빨리 가는 세월은 1988년 8월 31일 정년 회임을 하니 왕희학원에서 27년간을 지냈다.

왕희학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했지만,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많은 사랑과 은전을 입은 사람이다.

학교 설립자 일은 김희선생이 주신 은총과 함께 전교직원이 희로애락을 같이 하면서 화기애애한 사랑으로 감싸주고 돌봐주고 내가 받은 은혜 태산 같다.

교무과장, 교감, 교장, 학교법인 왕희학원 이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감사패와 공로패를 받게 하여 나를 영광으로 빛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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